하이든, 모차르트와 같은 고전주의에서 베토벤*을 지나 낭만주의로 넘어오면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리스트, 슈만 등이 대표적인 음악가로 나타납니다. 이 중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은 짧은 생을 살다가 아름다운 음악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했는데요, 모차르트도 35세로 젊었지만 슈베르트는 31세로 더 어렸고, 멘델스존을 38세로 마흔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쇼팽 또한 39세로 이 시기의 음악가들 중 단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신동, 멘델스존은 음악가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신동으로 대비됩니다. 재미있고 간결하게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을 알아보겠습니다.
* 베토벤은 고전파로 분류되지만 낭만파로 넘어가는 과정이 베토벤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전파, 낭만파와 같은 음악사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바로크 음악 (비발디, 바흐, 헨델)
2. 고전파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3. 낭만파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핑, 리스트)
4. 국민악파 후기 낭만파 (그리그, 드보르작, 드뷔시)
5. 근현대음악 (라흐마니노프, 에릭 사티, 쇼스타코비치)
아래는 음악가들의 수명을 제가 그래프로 만든 겁니다. 가장 어린 나이로 삶을 마감한 슈베르트와 가장 오래 살았던 하이든에 맞춰 빨간 점선으로 표시를 했습니다.
가곡의 왕,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년~1828년)
10대 시절부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6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슈베르트는 가난하게 살다 31세로 삶을 마감합니다. 1797년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빈 외곽의 소도시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하는 아버지의 13번째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자식을 16명이나 두었던 슈베르트 집안은 가난했지만 음악을 가까이했던 환경으로 슈베르트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아름다운 미성으로 노래도 잘 불러서 국립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혜택도 받게 되지만 변성기가 오면서 목소리에 변화가 와서 합창단을 나와야 했다고 합니다. 열세 살부터 작곡을 시작하였고, 당시 오스트리아는 군입대가 의무였기에 입대를 면제받기 위해 17세에 억지로 교사의 길로 들어섭니다. 18세에는 존경하는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을 비롯해 한 해에 20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합니다.
슈베르트는 우연히 친구의 집에서 뮐러의 시를 읽다가 시집안의 시 24편 모두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겨울나그네"를 완성합니다. 슈베르트는 괴테, 실러, 하이네를 비롯하여, 셰익스피어와 친구 마이어 호퍼의 시까지 시에서 악상을 떠올리고 곡을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슈베르트가 작업을 하는 동안 집중력이 대단하여 집에 손님이 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죽기 1년전에야 겨우 피아노를 가질 수 있었던 슈베르트는 좋은 친구들을 두었습니다. 화가, 변호사, 시인 등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주로 슈베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는 사교 연주회 "슈베르티아데"라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1821년에는 친구들이 뜻을 모아 악보를 인쇄해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5세에 매독에 걸려 건강을 잃고, "아베마리아"와 같은 걸작을 쏟아내며 명성을 높여갑니다. 그리고 그토록 존경했던 베토벤을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사망하자 크게 상심한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관을 드는 운구자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28년 건강이 악화하여 사망할 때 친구들이 모두 모여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하지만 여기 베토벤이 없잖아". 베토벤을 마음 깊이 존경했던 슈베르트는 소원대로 베토벤의 표 옆에 묻히게 됩니다.
부잣집 도련님,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년~1847년)
클래식 역사상 가장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멘델스존은 유대인으로 철학자로 이름날린 할아버지와 은행가인 아버지를 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드러내자 부모는 아들의 뜻을 따라 충분히 지원해주었고, 누나와도 음악적으로 교류하며 풍족한 삶 속에서 음악가로 성장해갈 수 있었다.
멘델스존의 집안을 조금 더 설명하자면, 할아버지는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계몽주의 철학자였고, 아버지는 유수의 금융기관을 운영했다. 은행 이름조차 멘델스존 형제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배상금 징수 책임 은행이었으며 나치가 강제 폐쇄하였다. 외할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 은행가, 외삼촌은 외교관이면서 예술가를 적극 후원했습니다.
1809년 독일 함부르트에서 예쁘장한 외모로 태어난 멘델스존은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며, 누나 파니와 멘델스존의 천재성이 드러났습니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멘델스존을 위해 유명한 언어학자나 음악가 등 과목별 우수한 선생님을 초빙하여 엄격한 커리큘럼을 짜서 가정교육을 하였습니다. 라틴어나, 프랑스어와 같은 외국어도 잘해서 17세는 라틴어 희곡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선생님께 선물하는 듯 여러 분야의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열두 살에는 베를린에 소재한 자기 집안에 있는 극장에서 오페라 "병사들의 연애사건"을 공연했고, 열세 살에는 괴테의 집에서 자신의 1번 작품으로 정한 피아노 4중주를 연주하고 괴테에게 헌정합니다. 괴테와 멘델스존은 굉장히 가깝게 지냅니다. 하지만 멘델스존만큼 천재성을 지닌 누나 파니는 여자라는 이유로 괴테를 만나는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열두 살에 바흐의 평균율 1권을 모두 암기해서 연주하기도 했죠. 멘델스존과는 서로 창작과 예술에 관한 깊은 교감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평생의 동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10대에 이미 완성된 예술가의 면모를 모여 피아노 선생님의 능력을 뛰어넘어버립니다. 천재성은 어떻게 보면 모차르트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는데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아버지는 비판적 평가로 유명한 케루비니를 찾아서 멘델스존의 연주를 들려주었고 케루비니의 극찬을 받자 아버지는 멘델스존이 하고싶은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최고의 지원자가 된다. 하지만 누나인 파니는 아버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결혼을 하라고 강요받습니다. 파니는 빌헬름 헨젤이라는 화가와 결혼을 했는데 거의 50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고 이 중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발표된 곡도 있었습니다. "12개의 노래"라는 가곡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이탈리아인"이라는 곡이 누나가 작곡한 곡입니다.
멘델스존은 많은 작품을 쏟아내다 오랫동안 준비해돈 오페라 "카마코의 결혼"을 발표했으나 실패하고 큰 상처를 받아 다시는 오페라는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가곡집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고, 스무 살에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지휘하여 공연하였습니다. 이후 유럽 전체에 바흐의 재발견이라는 붐을 일으켰습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 자리 잡고 결혼도 하였으나,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있었던 멘델스존은 영국과 독일을 왔다 갔다 하며 연주회를 합니다. 하지만 독일 베를린에서도 멘델스존에게 일을 맡기고 싶어 했고 멘델스존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를 왕복하며 일중독처럼 생활합니다. "예니 린트"라는 여가수에게 빠져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그녀를 생각하며 작곡하였고 대중을 열광시킵니다. 그러다 누나 파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같은 해 멘델스존도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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