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테크닉과 예술성을 가진 거장을 부르는 단어 "비르투오소"가 어울리는 연주자가 있습니다.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엄청난 기교를 가진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의 뛰어난 기교로 팬클럽을 몰고 다닌 피아노 스타 리스트, 그리고 예술성에서 누구보다 뛰어났던 쇼팽이 바로 그 세 사람인데요, 이 글에서는 최고의 기교를 가진 파가니니와 리스트 두 사람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쇼팽은 제가 좋아해서 단독으로 소개하고 싶어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 1782년~1840년)
파가니니는 1782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바이올린을 시작하고 선생님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게 되는 등 천재성을 보이자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다섯 살의 어린 파가니니를 휴식도 없이 10시간을 연습시키고, 밥을 굶기거나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아홉 살에는 전문적인 레슨을 받고, 열한 살에는 연주회도 열고 작곡도 시작했습니다. 연주회로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최고의 바이올린 비르투오소를 찾아다니며 레슨을 받지만, 소개받는 선생님들마다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는 본인들이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였습니다. 파가니니의 천재성은 음악 역사상 최고 수준이 나이었을까 짐작합니다. 부와 명예를 얻어 방탕한 생활을 하며 토스카 지역에 머물다 거액의 빚을 져서 아끼던 명품 바이올린 "과르네리"까지 팔게 되었습니다. 22세에는 제노바로 돌아와 명성을 드높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여동생이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다가 기절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도 꺼리고 제자도 많이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연주 기법을 빼앗기게 될까 봐 걱정이 많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아쉽게도 파가니니의 기법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고 합니다.
파가니니는 대표곡 카프리치오 24곡을 작곡했는데 파가니니 연주 기교의 집합체인 일종의 연습곡으로 왠만한 연주 실력으로는 흉내내기도 힘들 만큼 어려운 곡입니다. 파가니니는 음의 이동도 크고, 반주와 연주를 동시에 소화한다거나, 심지어 네 음을 동시에 소리를 내는 등 희대의 천재적인 화려한 테크닉의 소유자였습니다.
파가니니는 밀라노에서 비앙키라는 여가수와 사랑에 빠져 유일한 아들 아킬레를 낳습니다. 비앙키와 헤어진 후 파가니니는 아킬레를 홀로 키우는데 아들에게 극진했습니다. 유럽 전역에 걸쳐 순회공연을 할 때에도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아들을 위해 펜션에 머물며 집과 같은 환경을 제공해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은 파가니니는 다른 음악가들도 곧잘 도와주고 방탕한 생활도 조금 절제하는 듯했지만 카지노 사업의 실패와 건강 악화로 니스에서 사망합니다.
파가니니와 관련된 영화도 많은데요, 깡마르고 긴 팔다리와 흐트러진 긴 머리에 인간의 솜씨라 믿을 수 없는 연주실력을 가진 파가니니의 공연을 보며 많은 여자들이 혼절을 합니다. 이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얻는 기교라는 오해를 받았고 죽고 난 뒤에도 황당한 일을 겪게 됩니다. 임종 당시 말도 거의 할 수 없는 파가니니에게 병자성사를 하러 온 신부가 집요하게 심문하여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결국 파가니니는 원하는 묘지에 묻힐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사랑했던 아킬레가 36년에 걸쳐 노력한 끝에 제노바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현란한 기교의 피아노스타, 리스트 (Franz Liszt, 1811년~1886년)
시대의 피아니스트 리스트는 1811년 헝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외아들이었던 리스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리스트를 뒷바라지하며 음악가로의 성장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줍니다. 9세 때 연주회를 하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카를 체르니를 만나 피아노를 배우고,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웁니다. 12세 때 공연한 연주회에는 베토벤이 참석하여 응원을 받았고, 슈베르트에게도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6세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가 파리에 정착하여 피아노 레슨에 집중합니다. 스무살에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충격과도 같은 큰 감명을 받아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피아노 연주에 있어 파가니니처럼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많은 시간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며 연주 실력을 더 향상하는데 몰두했다고 합니다. 또한 파가니니의 여러 바이올린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고, 연주 실력에 대한 집착으로 "초절기교 연습곡"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합니다. 리스트는 1832년 쇼팽을 만나 친한 친구가 됩니다. 활발하고 사교적인 리스트와 내성적인 쇼핑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 신동이자, 각각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음악가로 성장했고 화려한 연주는 물론이고 작곡을 통해 낭만주의 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성격차이로 인해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리스트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는데 유부녀이면서 연상이었던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져 이탈리아로 도피했다가 본격적인 공연활동과 성격차이로 또 헤어지게 되죠. 그 와중에 리스트와 백작부인 커플은 쇼팽에게 조르주 상드라는 쇼팽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여인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연주활동을 통해 리스트는 신드롬을 일으켰고 많은 돈을 벌었고, 어느 공작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져 연주회를 줄이고 교향시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로마에 자리를 잡은 리스트는 독일, 헝가리를 오가며 종교음악과 헝가리 광시곡 등의 작품을 정리합니다. 리스트는 고향인 헝가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쇼팽도 고향인 폴란드 민속음악에 애정이 있었던 것처럼요.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은 헝가리 집시들의 전통음악인 차르다슈를 차용한 것입니다. 리스트는 이미 발표된 작품이나 민속음악에서 영감을 받고 편곡하는 것을 좋아해서 작곡가로는 연주가만큼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말년까지 작곡과 연주에 몰입하다 1886년 사망합니다.
잘생긴 외모에 현란한 기교와 쇼맨십으로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리스토마니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고, 리스트의 손수건이나 장갑, 머리카락을 얻고자 하는 팬들로 공연장이 아우성이었다고 하니 요즘의 아이돌 스타 같은 음악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악가의 이야기들이 예술적인 성향으로 많은 스토리를 남겨서인지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공부하며 글을 쓰는 이 시간들이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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